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홍경래의 난 (문단 편집) === 후기 === ||[youtube(EOSSpovlevo)]|| 진압군의 공세로 농민군은 연전연패하였다. 이때 진압군이 초토화 전술로 밀어붙이면서 '''참여를 안 했음에도 불구하고 반군이 장악한 지역의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살육'''을 저지르자 [[정주시|정주]]와 주변 지역인 [[박천군|박천]], 가산 지역의 많은 농민들이 정주성으로 들어와 100여일 동안 홍경래 군의 지도층과 함께 진압군에 대항하였다. 그리고 이 '''농성 과정에서 봉기의 성격이 완전히 바뀌었다.''' 초기 주도 세력이던 향임층과 상인층이 이탈한 반면, 자발적인 농민층이 주도 세력으로 급부상한 것이다. 그리고 지지 세력층이 [[단일화]]하면서, 난을 주동한 지휘부도 반란을 이어나가기 위해 내부에서 신분 질서를 타파하고 식량을 고루 배급하는 등의 활동을 시작했다. 이 때문에 홍경래의 난을 농민 전쟁으로 보는 해석도 존재한다. 이 시점에서 이미 반란 자체는 실패로 돌아간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농성 준비에 필요한 대비가 전혀 없었던 상황에서 의외로 [[정주시|정주성]]의 농성은 길게 이어졌다. 이는 진압군의 초토화 전술로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 격분한 많은 백성들이 농성을 지원하였기 때문이다. 관군은 홍경래의 난 전기 때처럼 내부에서 내통자가 발생하기를 바랐으나, 이미 민심을 잃은 관군을 적으로 생각하며 일치단결된 상황에서 그런 내통자가 나오면 미처 내응하기도 전에 목이 날아가거나 혼자서만 간신히 도망치기 일쑤니 관군 입장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었다. 그러나 보급로도 끊기고 점령지도 전부 정규군에게 해방되 외부 원군도 없어 사실상 완전 포위된 상황에서 점점 상황이 어려워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므로 결국 정주성은 농성을 시작한 지 3개월을 버티다가 결국 함락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농성이 엄청나게 치열했으므로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관군 쪽에서 대포와 공성탑을 동원하여 공세를 퍼부었으나 오히려 많은 사상자를 남기면서 공성전이 길어졌다. 나중에는 조정에서 당시 사령관이던 박기풍을 경질하고 류효원[* 영정조 시기 무관 고위직을 역임한 류진항의 아들로 조선 후기 무반 가문을 대표하는 진주 류씨의 일원이다. 난 이전에는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및 [[삼도수군통제사]], 좌/우포도대장을 맡았고, 사후 병조판서 추증 및 시호 무숙(武肅)을 받았다.][* 상술했듯이 원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오군영에서 병력을 뽑은 순무영의 장으로 양서순무사 이요헌이 발탁되었으나 그는 명목상 총사령관으로 후방인 한양에 남아 부사령관 박기풍과 류효원에게 일임한 상태였다.]으로 교체하면서 빨리 진압하라고 닦달했다. 이에 관군 사령부에서는 정주성 성벽 밑으로 땅굴을 파고 1,700근이 넘는 폭약을 묻은 뒤 이를 이용해 성벽을 통째로 폭파시키고 나서야 가까스로 정주성을 함락할 수 있었다.[* 이 공성법은 오스만을 포함한 유럽에선 화학기술이 발전해 화약이 흔했고 실전사례도 있어서 자주 이용한 전략이었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최초의 시도였기에 폭약을 터뜨리기 전에는 효과에 대해 반신반의했다고 한다. 사실 조선의 화약 생산량은 18세기 초에야 폭증했기 때문에 그 전에는 이런 전술을 시도도 못했으므로 당연히 효과를 의문시할 수밖에 없었다.] 홍경래는 1812년 4월 19일 관군에게 정주성이 함락될 때 끝까지 저항하다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그의 시신은 참수된 뒤 '군대를 일으켜 반역한 우두머리'라는 죄목으로 처리되었다. 이 때문에 연좌 처벌 강도도 더욱 높아짐에 따라 홍경래의 아내 최씨는 성이 함락된 이후 체포되어 참수형에 처해진 뒤 거리에 목이 내걸렸다. 다른 지도자들 역시 모두 사로잡혀 처형됐다. 김사용은 저항하다가 총탄에 맞아 전사했고, 이희저 역시 저항 중에 관군의 의병 함의형한테 살해되었으며, 양시위는 저항하다가 붙잡혀 바로 참수되었다. 우군칙과 홍총각은 도주하다가 관군에게 붙잡혀 한양으로 압송된 뒤 참수되었으며, 김창시는 도주했다가 조문명에게 살해되었고, 박성간 & 박성신 형제는 도주하다가 관군에게 붙잡혀 박성신의 아들인 인초 & 인복과 함께 한양에서 참수됐다. 반군에 가담한 농민들에 대한 처벌도 상당히 잔혹했다. 정주성에서 체포된 이들은 총 2,983명이었는데, 이 중 10세 이하의 남아 224명과 여자 842명을 제외한 '''[[학살|1,917명은 4월 23일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두 처형당했다.]]''' 살아남은 아이와 여인들도 모두 [[노비]]로 전락했다. 이후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당시 조선에서 공노비는 몇 년 전에 혁파되었으니 공신들의 사노비로 분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조선 역사에서 굉장히 예외적인 케이스다.[* 이 처사가 얼마나 이례적이었는지는, 이후 난의 진압에 참여한 사람들을 논공행상할 때 "반란군 중에는 마지못해 난에 참여한 사람도 있을 텐데 성을 함락시키자마자 무턱대고 2천 명을 모두 처형한 것은 옳지 못합니다"라며 정주성 전투를 이끈 유효원의 삭직을 비변사가 요청하여 윤허를 받은 일에서도 잘 드러난다. [[http://sillok.history.go.kr/id/kwa_11206009_001|순조실록 1812년 6월 9일 자 기사]]] 유교 이념에 충실했던 조선은 반란이나 민란이 발생하면 주동자와 핵심 가담자는 일벌백계로 죽이지만 단순 가담자인 지역민에게는 선처를 베풀어 민심을 수습하고 본업으로 돌아가게 했다. 이는 고종 시기의 제1차 동학 농민 운동을 진압할 때까지 지켜진 대응 메뉴얼에 가까웠다. 그런데 이 원칙이 정작 홍경래의 난 때는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당시 평안도의 지방 속오군 다수가 반군에 가담했는지라 남은 관군의 사졸들은 훈련도가 너무 낮아서 훈련도감이 주축이 된 순무영이 전적으로 도맡았는데, 이들의 숙련도와 감투정신은 조선 최고였지만 민사작전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었다. 게다가 한양에서 긴급 파병된 중앙군이 평안도 칼바람 아래 탈영이 상습인 지방병들의 목을 매달아가며 토벌을 진행하니 그들의 분노를 사게 되어 반군은 완전히 악에 받혀버렸다. 특히 정주성 공성전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관군의 민간인들에 대한 [[전쟁범죄|잔혹행위]]가 심했다. 관군 병사들이 주민들을 약탈하고 학살하는 것을 관군 지휘부에서 통제하지 않다보니 병사들의 약탈과 학살이 심각했다. 이로 인해 관군에 대한 적개심이 더욱 커지게 된 주민들이 반군과 함께 필사적으로 저항하게 되면서 공성전이 예상 외로 석달이나 진행됨에 따라 관군의 피해가 커지게 되었다. 야지에서 격파 후 와해된 것이 아니라 성 안에 들어가 포위당하고 있어서 피할 길도 없었고, 결국 조선조 유래없는 잔혹한 결말을 맞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